나무가 만들어내는 신생의 길을 수소문한다.
조경수목을 문화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
모든 이의 삶이 융합이고 그가 살아가는 자체가 인문학인 것이다. 나라는 주체와 바깥 대상이 만들어내는 틈새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조경수목을 문화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사람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게 나무이고, 숲이다. 인류의 문명이 숲의 처소를 빌려 빌딩을 세웠듯이, 조경가는 끊임없이 숲을 경외하며 사람과 나무의 관계에서 새로운 환경의 단초를 읽어내야 한다. 옛 사람의 생각과 그 시대적 상상력의 복원이야말로 문화콘텐츠 창작의 원천이다. 조경수목에 문화콘텐츠의 동력을 입히는 일은 조경가의 또 다른 사회적 역할이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출발할 때, 세상은 살아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환경에서 나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친밀한 게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주고 받은 과정에서 만들어낸 생활 양식 자체가 문화이다. 나무와 사람이 소통하여 만든 기술, 예술, 관습, 양식 등 참으로 넓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람의 생활 활동에 목적 의미소를 지닌 행위가 있고, 행위의 산물로 이어지는 과정에 놓여 있는게 문화라면, 문화의 중심에 식물성 사유가 놓인다. 식물성 사유는 곧 생태적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생의生意’를 인지하는 것이다. ‘생의’는 천지자연에 널려 있고,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다. 해서 ‘살아있음’으로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 ‘도道’에 다름아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도’를 이루는 과정은 그래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는 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측은지심과 생명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우주만물의 ‘살아있음’에 다다를 때, 나무는 새로운 의미와 상상력과 문화콘텐츠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다. 그래서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책에 수록된 조경수목들은 학교에서 파종하여 기르고 옮겨 심고 가꾸어 보았던 나무들에 대한 콘텐츠이다. 직접 내 몸과 부딪혀서 내 안 깊숙한 곳에 꿈틀대는 나무들이다. 하나같이 주마등처럼 내 기억의 세포들을 불러일으키는 나무들이다. 가능하면 나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직관적인 감성을 근거하여 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나무에게 다가가는 올바른 길이다. 그런 다음에 나무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탐구하면 될 것이다.
하심의 세계는 나무의 세계이다.
사람에게 나무는 동반자이고 나무와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 영역을 둘러보고 산책하는 일이 나무의 인문학일 것이다. 인문학이 내 실생활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문화이고, 문화는 끊임없이 재탄생되어 전해지는 특성을 가졌다. 그 과정에 내가 존재한다. 공허한 울림이 아닌, 몸으로 전해지는 감성과 직관의 자양분은 노동이며 땀이다. 나무를 심고, 캐고, 현장 설계하며 다급한 외침이 존재하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나무의 콘텐츠를 생산하였다. 그 세월에는 미처 몸을 풀지 않고 해동된 땅에서 시범 보이는 삽질의 봄도 함께 한다. 내 손목의 앨보와 허리는 그때 이미 고장 날 것을 예고한 것이다. 땀 흘린 오후에는 막걸리가 있어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나무와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 층지지 않고 참하게 보인다. 나무는 그 어렵다는 경지인, 하심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세계는 나무의 세계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고 툭툭 속마음을 털어낼 수 있다. 나무를 쳐다만 보아도 내가 귀해지는 일이건만 서로 나눌 콘텐츠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신생은 수소문, 매일 아침 예비되어 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만들어 내는 신생의 길은 수소문으로 가능하다. 눈 뜨고 일어나면 이미 신생의 길이 놓여 있다. 그러니 찾아 나설 일이다. 새로울 것 없는 나무에게 신생을 수소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살아가는 일이 신생이어야 한다. 이 책은 조경수목으로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로 구성되었다. 다섯 개의 꼭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꼭지는 낙엽활엽관목에 해당하는 조경수목이다.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살펴보면 말을 건네 온다. 두 번째 꼭지는 계절을 연결하는 눈높이에서 만날 수 있는 낙엽활엽교목으로 구성하였다. 세 번째 꼭지는 시원한 바람과 흔쾌한 몸짓을 구현하는 낙엽활엽교목을 배치하였다. 네 번째 꼭지는 강건하게 보살피는 의리의 나무들로서 상록수를 다루었고, 다섯 번째 꼭지는 특별히 근사한 미인으로 비유한 만경목과 지피초화류로 구성하였다. 각각의 콘텐츠에는 나무와 얽힌 내 자신과의 교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문화콘텐츠로서의 운문과 산문이 적절히 녹아 있다. 곳곳에 나무의 에스프리를 운문으로 작성하였는데, 이는 낭독을 하여도 울림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만의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작성해보는 것을 권한다.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는 생산에 기반을 둔다.
조경 교육 현장에서 조경 수목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조경수목학을 어떻게 활기 있는 수업 장면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배우는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여 뿌듯함을 지니게 하는 방도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시작한 것이 문화콘텐츠적 접근 방법이다. 스토리텔링을 접목시켜 내 가까이에 조경 수목이 존재하는 것을 어느 순간 퍼뜩 깨닫게 하는 차별화된 교수 방법이다. 주변에 있는 조경 수목에서 깨달음을 찾아내는 방법이란 대상이 되는 한 나무를 나와의 관계를 선정하여 이끌리는 나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검색하고 사색하며 탐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해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들 ‘돼지’라고 하면 살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돼지 다리가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돼지에 개 정도의 다리만 달아줘도 비대해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짧으니까 몸집이 뚱보로 보인다. 시점을 바꿔 보면 대상이 달라진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알려면 검색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사색하고, 미래를 알려면 탐색하라. 검색은 컴퓨터 기술로, 사색은 명상으로, 탐색은 모험심으로 한다. 이 삼색을 통합할 때 젊음의 삶은 변한다.
”[출처: 중앙일보] 이어령 “암 통보받아···죽음 생각할 때 삶이 농밀해진다(백성호의 현문우답)“
조경수목학은 한 학기 공부하여 마치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래도록 묵히면서 접근하여야 하는 하드웨어적 속성을 지닌 교과 과정이다. 그러면서 조경 관련 학문의 가장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전체를 이끄는 아우라를 지닌 교과이다. 생명을 지닌 대상이며, 성장하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개체의 온갖 순간을 우주에 발현하는 게 조경 수목이다. 곳곳에서 만나며 누구에게나 쉽게 내어 주지만, 아무나 온전히 그를 가질 수 없는 이치이다. 볼 줄 아는 자는 오감으로 예민하게 가까이 할 것이지만, 스치듯 무심하여 온갖 순간을 뭉뚱그려 하나의 이미지로만 인지하는 자에게는 그야말로 먼 나라 뭉게구름 하나 떠다니는 한 번 흘낏 보는 행위일 것이다. 누가 더 세상을 윤택하게 가꿀 수 있겠는가. 조경수목학 공부 방법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창작하는 데 있다. 일단 글쓰기를 통하여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입혀 나간다면, 어느 순간 조경 수목에 대한 공부가 재미있고 다양한 수목학 용어들이 친근해진다. 조경 수목을 검색과 사색, 탐색의 삼색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이제는 직접 대상과 관계 맺기에 돌입하여야 한다. 주의깊게 파악하는 관찰, 음미하고 생각을 펼치는 고찰, 담박에 전체 구조와 흐름을 파악하는 통찰, 이 세 개의 삼찰이 관계 맺기 방법이다. 여기에 더하여 나의 내면을 대상으로 진전된 살핌인 성찰이 필요하다. 삼색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정립하고 삼찰로 관계 맺으며, 성찰을 통해 문화콘텐츠로 창작하는 조경수목학 공부 방식을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경 수목 공부의 시작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 생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