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품위
나무의 품위
일찍 잠든 날이면 어김없이 걷기를 위해 집을 나선다.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여명이 좋아서일까. 언제부턴가 이 시간에 걷고 사유하는 내 모습을 아꼈다. 그러다가 세상이 훤하게 드러날 때쯤이면 바쁘게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주로 광교산 입구 호수 주변이다. 겨울철이면 거의 매일 걷는다. 계절이 바뀌면서 생활이 서로 다투는 상황에 오면 걷는 일이 준다. 다시 여름 지나 가을 문턱이 턱까지 차오르면 걷는다. 떠나지 않는 일감들 속에서 걷는 일이 가동된다. 그러면서 깊어지는 겨울을 시작으로 한결같아진다.
언제부터인지 광교 호수 주변에 멋진 데크 길이 만들어졌다. 시민들에게 데크 길 이름을 공모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이 불리어지진 않는다. 그래서 혼자 ‘버찌마루길’이라고 부른다. 데크 길 양쪽으로 왕벚나무 터널이 꽃 피고 지는 한 계절을 지나 새까만 버찌까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버찌 떨어질 때까지 열심히 걷다가 그 이후에는 멈추고, 왕벚나무 잎이 물들기 시작하면서 다시 걷는 일이 시작되는 내 일상과 결부된 명칭이리라. 낙엽과 겨울을 면면히 걷는 습관이 한몫했을 것이다.
“걷다보면 나뭇가지가 머리를 찔러요”
왕벚나무 가지는 돋워진 데크로 인하여 줄기에서 뻗은 굵은 가지가 고생한다. 사람들의 머리에 닿는 민원으로 잘린다. 호수가에 심은 왕벚나무는 호안으로 마음껏 가지를 펼치지만, 길가에 심은 나무는 걷는 사람에게 자꾸 거추장스럽다.
나무에게는 품위가 있다. 어떤 나무든 자기 자신 고유의 수형을 지녔다. 나무는 식재된 환경과 사람의 간섭에 의하여 조금씩 모양이 달라진다. 나무의 수형은 긴 세월을 살면서 전해 내려온 유전 요소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바람이 잘 통하여 선선하고 시원하며, 햇빛이 필요한 양만큼 닿고, 그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그만이다. 품위를 지킨다는 것이 이처럼 단출하고 소박하다. 예쁘게 잘라주고 다듬어달라는 게 아니다. 나무 스스로 제 모습을 마련하여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나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하면 된다. 나무의 생리는 방어체계와 같은 말이다. 오히려 그 방어체계를 건드리면 나무가 죽는다. 왜 죽었을까 생각하는 우둔함은 나무 생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한다.
“나무는 그 자체로 아름답잖아요”
나무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모양을 유지한다. 숲의 나무와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나무일지라도 숲에서는 곧은 줄기를 가지며 우람한 체형으로 자라지만, 도시에 식재된 나무는 짧은 줄기와 굵고 낮은 가지를 가진다. 이 또한 올바른 표현은 아니다. 도시에 심겨진 나무의 수형은 제 고유의 수형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사촌끼리는 그래도 닮았다고 하는데 전혀 닮아 있지 않은 모양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일반적이고 대체적인 특정 나무의 오래된 평균적인 모양을 수형이라고 말한다면, 나무가 자신의 자태로 살 수 있는 것이 나무의 품위다. 사람에게 품위는 교양이고 품격이며 기품이고 체통이다. 나무의 품위라고 할 수 있는 나무 고유의 형태는 어쩌다 사람의 의도에 의하여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사람은 나무에게 관심이 많다. 관심은 곧 간섭을 일으킨다. 나무가 교양과 품격으로 근사하게 살려는 의지에 대한 개입이다. 사람이 나무에게 보이는 간섭은 그래서 무모하다.
“나무를 어떻게 전정하는 것이 좋은가요”
일반적으로 나무를 전정해야 할 부분을 말할 때, 역지逆枝, 교차지交叉枝, 도장지徒長枝, 내향지內向枝, 하향지下向枝, 맹아지萌芽枝, 평행지平行枝, 돌출지突出枝, 고사지枯死枝 등을 내건다. 전정의 뜻은 뭘까? 나무를 심어 놓고 사람이 정해 놓은 목적에 맞게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건전한 생육과 모양을 유지하기 위한 전제가 앞선다. 사람이 만들어 놓는 목적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 아름답게 하자는 것이고 둘째, 실용적이게 하자는 것, 셋째, 꽃피고 열매 맺는 생리적인 조절을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뜻과 목적이 있어도 결국 나무의 생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면 뜻과 목적은 상실되고 만다. 나무의 생장 원리를 알아야 하고, 나무의 고유 수형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아무 때나 전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잘라지는 가지와 줄기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간섭을 아랑곳하지 않고 수수방관으로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가지깃과 지피융기선이 뭔가요”
나무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어체계를 지니고 있다. 가지가 잘리면 잘린 가지를 새살로 싸서 감쪽같이 방어해내는 기작을 지녔다. 그런데 나무의 생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전정은 그렇지 않다. 잘라내야 할 선을 지켜야 하는데, 그 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잘라내는 것이다. 가지조직은 수간조직의 안쪽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가지조직은 가지의 기부에서 갑자기 깃을 만든다. 수간조직은 그 뒤에 자라서 가지깃(branch collar) 위에 수간깃(trunk collar)을 형성한다. 이 둘을 합쳐서 가지깃이라고 통칭하여 부른다. 나무 수간에서 뻗어나간 가지의 밑을 보면 도톰하게 살이 오른 부분이다. 이 부분을 ‘가지밑살’이라고 부르면 쉽게 보인다.
또한 자세히 보면 가지가 갈라지는 곳에 형성되는 솟아오른 수피가 만드는 선이 보인다. 이를 지피융기선(branch bark ridge)이라고 한다. 나무가 자라면서 지피융기선은 수간에 남는다. 가지를 자를 때는 수간과 가지의 분지지점을 수직으로 가상선을 긋고, 지피융기선의 각도만큼 가지밑살을 향해 선을 그은 다음 톱질을 하면 자른 단면이 쉽게 아물게 된다. 물론 나무마다 지피융기선의 각도와 가지밑살의 정도는 다르기 때문에 잘 관찰하여 결정해야 한다.
정말 아름다운 나무를 원한다면
나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연이어 애정으로 보아야 한다
나무마다 모습과 살아가는 방식과
전개되는 가지와 잎의 형태가 다르다
그러니 세상에 볼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무를 보지 못하고 사는 게
보람없이 사는 일이라고들 말하잖는가
“인공적으로 수형을 다듬는 나무들이 멋있잖아요”
수형을 인공적으로 다듬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나무 중에 향나무가 있다. 학교나 관공서에 많다. 향나무 수형을 만들고 다듬어 유지하는 일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
향나무는 마을의 우물가에도 있었고, 사당에도 심었으며 사찰과 궁궐에도 심었다. 향을 피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향나무는 모양을 내기 위하여 가지와 잎을 정리하거나 특정 형태로 각을 잡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향나무를 관공서 등에 많이 심고, 수형을 정리하거나 기하학적 형태나 구름 모양의 인공적 수형으로 전정을 하게 된 것이다.
사찰의 향나무는 전정을 하지 않고 자연형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주문 전후의 사찰 입구에 일본 나무인 가이즈카향나무를 줄지어 심어 놓은 것은 못마땅하다. 그것도 경비를 들여 인공수형을 만들고 유지하면서 보존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사찰에 심는 나무 역시 근본 있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사찰 자체가 문화재 아닌가. 여기에 울긋불긋 왜성철쭉을 심어 놓고 좋아라 할 수 없잖은가. 은은한 색, 단아한 꽃을 좋아했던 선조들의 심성이 지금 이토록 흐트러지는 것도 이와 같음이다.
“나 좀 그냥 내버려둬라”
최근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인간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하면서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죽어가는 한 인간 개체의 내적인 의지를 존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한 번 병원에 들어가 묶이고 호스 끼우면 환자의 의지는 없어진다. 그래서 유언을 미리 써 놓고 내가 어떤 상태가 되면 어디까지는 치료하고 어느 상태에는 치료하지 말라고 분명한 의사를 밝혀 놓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죽어갈 때 최소한의 인격적 품위를 가지고 가겠다는 의지이면서, 어느 상태에서든 생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다. 나무는 제 스스로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숲에서 자란 나무들은 일정 크기에 도달하면 제 스스로 가지를 마르게 하여 툭 떨어지게끔 한다. 그러면서 고유의 모습을 만든다. 잘못된 전정은 나무 개체마다 다른 위치에 놓인 가지깃도 찾아내지 못하면서 마냥 관심만 퍼붓는 형국이다. 왜 전정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잘라야 할 가지의 위치를 잘못 짚는 것이다. 가위와 톱이 있어 자르면 전정인가. 나무의 품위를 볼 수 있는 폭 넓은 사유의 지경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