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정원수목도감

한여름의 연한 노란색 꽃비에게-회화나무

온숨 2015. 10. 1.

■ 나무의 감성_19. 한여름의 연한 노란색 꽃비에게_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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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는 엊그제 같은데 따져보면 오래된 이야기다. 이천농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다. 설봉중학교라는 신설 중학교가 만들어졌고, 그 학교 교감선생님이 학교의 교화와 교목을 선정하기 위하여 나를 찾았다. 나는 그때 자생식물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임학 전공자, 한의사, 스님, 그리고 몇몇 사람들과 옻나무 연구회도 함께 시작했다. 활동은 미미했으나 의식과 목표는 분명하였다.

EMB00000c540fa9 사용되는 조경수목의 종류가 적은데도 다양한 자생수목을 조경수로 개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만 앞서고 있는 실정이었다. 직접 수목의 종자를 채집하여 파종한 후,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일의 실천에 나서야 했다. 그렇게 여기 저기, 이산 저산 계획을 세워 종자를 수집하여 씨를 뿌렸고, 재배 관리를 하던 때였다. 그 교감선생님에게 학교의 교목과 교화는 자생식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의기투합되어 현란한 색깔의 영산홍, 자산홍을 제쳐두고 자생철쭉인 산철쭉을 교화로 삼았고, 학자수라 부르는 회화나무를 교목으로 정했다. 회화나무 노란 꽃이 피니 과거 응시생들 바쁘겠다는 말처럼 학교에 근사하게 어울리는 교목이었던 것이다. 1989년의 일이다. 지금 그 학교의 울타리에 아직도 회화나무가 왕창 커서 있을 것이다. 오히려 학교 울타리 주변에 심은 회화나무를 계절마다 들락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심은지 얼마되지 않아 꽃과 열매까지도 가깝게 바라보며 관찰할 수 있었던 그 순간의 즐거움이 폐부에서 다시 살아난다. 단침이 고인다. 종자를 채취하여 파종하여 길러낸 그때의 나무들도 이미 조경수로 이용되어 곳곳에서 장년의 나이를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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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00000c540fac 회화나무는 학명이 Sophora japonica 이며 콩과의 낙엽교목이다.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중국에서는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었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Chinese scholar tree)라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들여와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다. 학명의 Sophora와 영명인 Chinese Scholar Tree에서 이 나무의 학구적인 어떤 분위기가 동서양을 가로질러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이 자생지로 매우 귀한 대접을 받으며 주로 선비들이 서당이나 서원에 즐겨 심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궁궐이나 오래된 고가에서 이 나무의 고목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중국의 경서인 『주례』, 「추관秋官」의 ‘조사’와 ‘소사구’에서 인용하여, “조사朝士는 외조外朝의 법을 관장한다. 왼쪽 아홉 그루 가시나무를 심은 곳에 고孤ㆍ경卿ㆍ대부가 자리를 잡고 모든 사士들은 그 뒤에 선다. 오른쪽 아홉 그루 가시나무를 심은 곳에는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이 자리를 잡고 모든 이吏는 그 뒤에 선다. 앞쪽 회화나무 세 그루三槐를 심은 곳에는 삼공三公이 자리를 잡고 주장州長과 서민이 그 뒤에 선다. 왼쪽 무늬 있는 돌嘉石을 깔아놓은 곳에는 허물이 있는 백성罷民들이 뉘우치게 하고, 오른쪽 붉은 돌肺石을 깔아놓은 곳에는 궁한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한다.”하였고,

朝士掌外朝之法左九棘孤卿大夫位焉羣士在其後右九棘公侯伯子男位焉羣吏在其後面三槐三公位焉州長衆庶在其後左嘉石平罷民焉右肺石逹衆庶焉

소사구小司寇의 직임은, “외조外朝의 정사를 관장하는 것이니, 모든 백성을 오게 하여 그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첫째는 나라의 위험함을 묻고, 둘째는 나라를 옮기는 것에 대해 묻고, 셋째는 임금 세우는 것에 대해 묻는다. 각자의 위치는, 임금은 남쪽을, 삼공 및 주장과 백성은 북쪽을, 여러 신하는 서쪽을, 여러 이吏는 동쪽을 향하는데,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어 임금을 보좌하여 임금이 그 중 좋은 의견을 따르게 한다.”라고 했다.

小司寇掌外朝之政以致萬民而詢焉一曰詢國危二曰詢國遷三曰詢立君其位王南面三公及州長百姓北面羣臣西面羣吏東面以衆輔志而蔽謀

(백성에게 물어라, 순민詢民 |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

제도적으로 백성들이 말할 수 있는 언로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백성의 처지와 나라의 안위, 중대한 국사 등에 참여하는 이 제도를 이익은 옛 성인의 빈틈없고 치밀한 제도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권력에 빌붙은 측근이 독재를 하여 백성의 좋은 생각이 정치하는 사람에게 전달될 길이 없었다고 탄식하여 말한다. 여기 삼공이 자리 잡고 서 있는 곳이 회화나무 세 그루의 자리이다.

EMB00000c540fad 사진에 있는 창덕궁의 돈화문 안에 있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는 바로 외조에 해당하는 곳이다. 회화나무는 꼭 외조의 장소만이 아니라 궁궐 안에 흔히 심었고, 고위 관직의 품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만년을 보내는 고향 땅에도 회화나무 심기를 즐겨 했다. 창덕궁 회화나무 8그루는 1820년대 중반에 제작된 동궐도에도 나타난다.

학교에서 재배된 회화나무를 구입하고자 찾아온 이는 아는 사찰에 회화나무를 보내고자 한다며 예전에 회화나무를 사찰에서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기야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에도 400년 된 수령의 회화나무가 있다. 보통 회화나무를 유교의 상징으로 보리수나무를 불교의 상징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찰에도 학승과 선승이 있고 기술승이 있었으니 회화나무 역시 학승의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 다만 요즘의 사찰에는 기술승이 없는 게 못내 아쉽다. 모두 학승이고 모두 선승이다.

회화나무의 한자는 槐이다. 공해에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활용되며 목재는 가구재로 이용한다. 꽃봉오리를 괴화槐花 또는 괴미槐米라고 하며 열매를 괴실槐實이라 하는데, 모두 약용으로 한다. 괴화는 동맥경화 및 고혈압에 쓰고 맥주와 종이를 황색으로 만드는 데 쓴다. 괴실은 가지 및 나무껍질과 더불어 치질치료에 쓴다.

『산림경제山林經濟』, 「卜居」에서는 “주택 동쪽에 버드나무를 심으면 말에게 유익하고, 주택 서쪽에 대추나무를 심으면 소에게 유익하며, 중문中門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삼대가 부귀하고中門有槐。富貴三世, 주택 뒤에 느릅나무가 있으면 백귀百鬼가 감히 접근을 못한다.”고 했다.

회화나무는 남성답다. 수형을 예측할 수 없는 게 특징이다. 사방 가지뻗음이 제멋대로 멋스럽다. 그래서 선비의 기개에 빚대어 말하기도 한다. 회화나무는 덧없는 인생을 비유하는 말에도 등장한다. 『다산시문집』, 「제2권」, 《시詩》의 ‘절에서 밤에 석문 신 진사와 함께 연구를 짓다寺夜同石門申進士聯句’를 보면 ‘수유의혈영須臾蟻穴榮’이란 시구가 있다. 개미굴의 영화도 모름지기 잠깐이라는 뜻이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당 나라 이공좌李公佐가 지은 《남가기南柯記》에서 나온 말로,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공주에게 장가들어 남가태수南柯太守를 지내는 등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마당가 회화나무 밑둥의 개미굴이 꿈속에서 찾아갔던 괴안국이었다는 것이다.

덧없는 인생을 깨우치는 회화나무는 늘 꿈을 꾸는 듯 높고 우람한 자태로 하늘을 이고 산다. 회화나무가 꽃피는 한여름의 운치는 비밀스럽다. 아주 커 쳐다보기 힘든 고목이 아니라 나이 많지 않아 눈높이에서 꽃을 볼 수 있는 크기의 회화나무 가로수라면 어떨까. 그 밑을 걸으면서 가지에 매달린 연노랑과 땅에 떨어진 꽃 잔치 사이를 갈등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깨어 있는가를 묻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홀로 걷는 즐거움과 깨어있는 각성을 촉구하는 회화나무 꽃비에 젖어본다.

(온형근, 시인_선달차회 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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