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정원수목도감

찰피나무 분분한 것들

온숨 201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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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 꼭 여기여야 만난다.

 

한 여름 청계산 산행이면 꼭 들리는 청계사, 어머님도 뵙고 찰피나무도 만난다. 처음 만난 듯 늘 새롭고 고개 쳐들고 숙이질 못한다. 벌들은 또 그리 왱왱대며 주위를 맴도는지 늘 기억 속에 찰피나무는 벌과 꽃이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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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구룡사에서 귀한 찰피나무를 만난 적이 있다. 아직도 치악산 구룡사에는 그 찰피나무가 있을까? 2003년 대웅전 화재 이후 아직 가보지 않았으니 찰피나무가 그 모습 그대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막상 찾아가서 그 나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봐 더욱 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는지 모른다. 핑계처럼 머뭇대는 것도 삶이듯 여전히 가보고 싶으면서도 애태우며 번뇌를 키웠다. 그래서 어느 겨울, 답사 겸 찾았다.

대웅전을 들렸다 왼쪽 뒤편으로 오르다 보면 한적한 공간에 그 단아한 모습으로 주변을 감싸던 나무였다. 그러나 그 나무는 보이지 않고 한쪽 산기슭에 잘 자라고 있는 다른 찰피나무를 보았다. 다른 나무들과 섞여서 자라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보았던 늠름한 찰피나무는 아니었다. 잎이 없으니 주변에서 찰피나무 열매를 주웠다. 한참을 주우니 꽤 양이 염주를 매달만큼 되었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편 산기슭에 소나무와 섞여 자라고 있다.

 

찰피나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저절로다.

 

어느 하나 놓칠 게 없는 나무다. 수형이 반듯하고 꽃이 밀원이라 벌에게는 꿈같은 보금자리에 놓인다. 피나무꿀이 그래서 인기다. 인기라고 하면 할 말이 더 있다. 예전에 군대 제대하는 사람들 손에 피나무 바둑판 한 개씩 들려져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대열에 끼지 못하였다. 아울러 피나무는 종류가 매우 많지만, 목탁에 사용할 정도의 알 큰 나무는 찰피나무가 제격이다. 목탁뿐이겠는가. 염주 역시 찰피나무 열매가 안성맞춤이다. 찰피나무는 조금 낮고 비옥한 산록에 자라며 생장이 빠르고 곧게 잘 자라 경제림 육성을 위한 조림수종으로 유망하다. 여름철 밀원이 풍부하여 밀원수종, 수형이 아름답고 잎의 질감과 색감이 수련하여 조경수종으로 가치가 높다. 가로수나 공원수, 생태공원에 적합하다.

 

분분한 꽃망울이 활짝 피어 있을 때면 쓰러진다.

 

찰피나무 꽃 핀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복이 어느 정점을 찍고 돌아올 정도 되는 홍복洪福이라 하겠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메모하였다가 일부러 서둘러 가지 않는 한, 미처 생각지 않았다가 만나는 기쁨이란 속으로 신나서 들뜨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야 싱글벙글이지만 괜히 이상하게 여길까봐 피부를 이루고 있는 세포마다 벙글대는 들뜸의 대상이 내 자신이라는 데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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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무를 보고 싶으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있던 서둔캠퍼스를 찾는다. 피나무 가로수 군락이다. 길옆으로 잘 자라고 있다. 예전 농화학과 건물 마당 가장자리이면서 뒤편 임학과와 오른쪽 원예학과 사이로 난 길을 가면서 오래도록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텅 비어 있을 때 보러 갔다. 마치 해방 후 군정시대의 풍경과 같아진 캠퍼스 주변을 한참 걷다가 농화학과 앞에서 피나무 가로 군락을 가슴이 시원할 만큼 멋지게 기막힌 풍경을 만났다. 피나무에 비해 잎이 좁고 끝이 꼬리처럼 길며 종자가 매우 작은 게 구주피나무(Tilia kiusiana)였다.

 

마음 깊은 생각을 보살핀다.

 

쉽게 모두 다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찰피나무를 바라보면 의식 있고 마음 깊은 생각을 지닌 선각자와 만나는 기분이다. 누군가 나무의 가치를 알고 일부러 구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벼르고 마음먹어 어디선가 가져와 심었다는 것이다. 분분한 꽃망울을 보려고 했겠는가. 가을이면 프로펠러 달린 열매가 핑구르르 날리면서 떨어져 사방을 뒹굴면 그것을 청소하느라 투덜댈 동자승이야 그 깊은 나무의 결을 모르겠지만, 얼마나 출중한 예언자다운 은혜로운 생각이었겠는가.

피나무 종류는 많다.

찰피나무는 단연 벌이 대단히 좋아하는 꽃을 단다. 이렇게 벌이 즐겨 찾는 꽃을 가진 식물을 밀원식물이라고 한다. 찰피나무는 그 중에서 잎과 함께 은은하게 피면서 달콤한 향기와 맛 좋고 풍부한 꿀로서 벌을 유인해 수정을 하여 열매를 매단다. 우리나무 피나뭇과의 식물은 대부분 키가 큰 교목성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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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무Tilia amuresis

달피나무라고도 하고

열매가 둥글고 모서리각이 없거나 희미하다

찰피나무의 학명은 Tilia mandshurica이고

열매는 둥글며 밑에 5줄의 희미한 모서리각이 있다

보리자나무Tilia miqueliana

찰피나무에 비해 잎이 다소 좁고

열매가 납작하게 둥글고

밑부분에만 5개의 모서리각이 있다

염주나무는 Tilia megaphylla

열매는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며

뚜렷한 밑에서부터 끝까지 5개의 모서리각이 있다

모두 갈색털에 덮여 있다.

이런 열매가 프로펠러 모양의 포에 달려 있는 모습이 독특하여 볼만 하다

 

염주나무는 습도가 유지되는 계곡에 잘 자란다. 낙엽활엽소교목으로 국내에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이며 넓은 계란형의 수관 모양과 하트 모양의 잎이 아름다워 가로수와 녹음수로 적합하여 잎 뒷면에 은백색의 털이 촘촘하게 나 있어 단식, 혼식, 군식 모두 잘 어울린다. 보리수와 잎이 비슷하여 사찰조경에도 많이 쓰인다. 피나무 종류는 대부분 하트형 잎이며 좌우 모양이 같지 않은 비대칭이 귀엽고 바라볼수록 재미있다. 잎 가장자리는 톱니가 있어 부드러운 기운을 날카롭게 감추고 있다.

 

찰피나무를 만나면 그래서 우쭐해진다.

 

꽃 분분 피어 심장형 잎에 가려서 함초롬하게 내려 피고 있는 찰피나무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바라봄이, 기대함이 무엇이었겠는가를 다시 생각한다. 평소에 보고 싶던 게 분명하지만 일상에서 아무 탈 없이 불편 없이 지냈다는 게 스스로 부끄럽다. 좋아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꾸짖어 키우지 못했으나 여전히 만나자마자 빠져들게 한다. 나와 찰피나무가 서로를 모자라게 하는 인정에 갇혀 있는 게다. 서로를 애틋하게 하는 것은 기대감이고 그래서 서로의 속마음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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